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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가을 블로그

2024년 09월 17일--views

나와 가족

가족이라는 렌즈로 나를 들여다보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최근에는 좀 바빴죠. 올해 1학기로 학교를 마쳤고 (3년 만에 조기졸업 나이쓰) 학교를 마치자말자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니가 선택한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를 계속해서 되뇌인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올해 2024년 남은 시간은 좀 글을 열심히 쓰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개발적으로 쌓아놨던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죠. 올해 잡은 키워드가 “정리”인데 너무 또 어질러놓은 것 같아 뜨끔하네요.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또 있습니다. 글또라는 개발자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기 위함이죠. 그 모임이 제 지향점과 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도록 하는 장치로서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은 죽 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땅바닥에 너불러진 잡동사니를 치우려면 걔네들을 어디다가 둘 건지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일단 옷은 빨래통에 넣고,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리고, 립밤은 수납장에 넣고. 그런데 지금 제 머릿속엔 서로 엉겨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물건밖에 없네요. 쓰레기통도 수납장도 없어서 공간도 우선 확보해야 합니다. 너저분한 걸 분류하느라 더 너저분해질 순 있겠지만, 그래도 한걸음 내딛어 봅시다.

어느 가족사진
Photo by Hoi An Photographer on Unsplash

소통 요소로서의 가족

소통을 하는 이유는 자신과 상대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정리하여 다음 액션을 정하기 위함입니다. 당사자들 간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구성요소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람의 주된 요소 중 하나는 그의 가족입니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족이라는 요소는 결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가족이란 그 사람과 가장 끈끈하게 엮여있는 속성이지만 동시에 가장 깊숙히 감추어져 있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드러나기 쉬운 속성인 지위, 재력, 외모, 직업, 말투도 중요하지만 어린 시절이나 가족과의 관계까지 알아야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는 취재하는 인물과 본인의 가정환경부터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소통을 하려면 서로의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OK.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가정사를 알아야 한다, 음… OK. 그러나 소통의 전제조건으로서 그 사람의 가정사를 알아야 한다? 오우. 이는 좀 급진적인 주장입니다. 하여튼 저도 이전에 그렇게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당장 회사에서 집안 사정을 아는 동료는 정말~ 로 손에 꼽기도 하고요. 아예 없어도 이상한 게 아니죠. 2-3년 간 같이 일을 해도 서로를 모를 수 있네요.

가족 이야기는 프라이버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본인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이 까발려진다면 수치심이 들 것이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것이고 불안정한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할 겁니다. 집안 사정을 공개했을 때 손해볼 가능성(상대가 날 색안경을 끼고 볼 가능성이나 약점을 노출한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에 굳이 공개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만연하기 때문에 당근으로 만나는 친목 모임에서 서로의 가정사를 까발리는 희한한 풍경은 절대 없겠죠.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궁금한 거 자체가 실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고, 깊은 이야기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요.

가정사 이야기가 취미나 MBTI처럼 가볍게 이야기되는 분위기였으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힘들겠지만 저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아픈 엄마

저는 막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넷째 여동생의 오빠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자연분만을 하려다 일이 잘못되어 애기는 뱃속에서 죽고 엄마도 죽다 살아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건강은 완전 나빠져 집 밖에 잘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왠지 혼자서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습니다. 기억나는 가장 첫 칭찬은 옷을 올바로 입었을 때입니다.

이 느낌은 성향으로도 발전했습니다. 나만의 공략법을 만들어 시도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지구력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술래잡기할 때 타겟을 괜히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 한 애만 죽어라 쫓아다니면 좀 느릴 수는 있어도 100%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의 현상을 집요하게 분석하는 걸 좋아했고, 남들이 시도하지 못한 방법을 발굴해내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 했습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있어서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으면 심정이 굉장히 비통했습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자리에 앉아있어라 라고 하는 게 야단처럼 들려서 (그렇게 듣고 싶지 않은데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질문해야 할 영역을 궁금하지 않다는 물감으로 덧칠했습니다. 사회성이 좀 떨어졌죠.

엄마에겐 죽을 고비가 또 찾아왔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에는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오른쪽 반신의 감각이 둔해졌고 말도 어눌해졌지만 무엇보다도 중환자실 면담때 살기 싫다는 절규가 뇌리에 박혔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등산도 매일 갈 정도로 건강이 돌아오고 있었는데 말이죠…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공부는 적당히 잘 했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최상위권으로는 갈 수 없다는 생각에 흥미도 떨어졌고, 의미를 찾아나서는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수능을 열심히 준비하고 좋은 대학으로 가는 게 무의미하다 느껴져 고등학교는 중퇴를 했습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어요.

엄마는 다른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직장암이 늦게 발견되어 4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요즘 부산으로 내려 가고 싶은 이유 중 절반은 혼자 부산에 있는 아빠가 신경쓰여서이기도 하죠.


부족한 사회성은 집 밖에서 지내면서 좀 나아졌습니다. 군대에서 별의 별 희한한 동기들을 만났고, 독립영화배급사에서 친한 누나들과 일하면서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격정적인 폭풍이 휩쓸며 지나갔고, 운이 좋게 첫 회사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의 성향이 잘 맞아서 재밌게 일 하고 있습니다. 연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적으로 좀 성숙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엄마는 내 안에서 살아있으면서 영향을 줍니다. 저는 그 영향을 인지하고 나름대로 삶을 풀어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 착한아이 콤플렉스와 같은 성향: 뭔가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고 좀 굳은 일을 도맡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항상 듭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챙김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선을 의식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선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길…
  • 안되는 것 붙잡고 끙끙대기: 요즘은 질문 잘 하는 거 같아요. 일은 함께 하는 거니까… 삶은 더불어 사는 거니까… 그런데 하여튼 질문을 할 때에도 의식적으로 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누군가에게 의지는 잘 안하는 것 같아요. 사람이라 의지가 필요하긴 할텐데…
  • 회의주의: 겉으로 봤을 때 티는 잘 안나지만, 제 속엔 회의주의로 똘똘 뭉쳐있어요. 그렇다고 그게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고 낙관적 허무주의랑 비슷한 느낌일런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좀 더 본질적인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장 내일 차에 치여 내 몸이 고깃조각이 되어 흩뿌려진다고 해도 후회없도록 사는 게 맞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라고 자주 되뇌이기도 하구요.
  • 적당한 현대 의학: 엄마는 현대 의학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나는 그냥 의사 말을 적당히 잘 듣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고혈압이었는데 혈압약을 안먹다가 뇌에서 피슈우웃… 해버린 거니까요. 혈압은 대개 본태성(유전)이라 저도 젊은 것 치고 혈압이 좀 있어서 약을 챙겨먹고 있습니다. 갑자기 길 가다가 쓰러지면 억울할 거 같아요. 안쓰러질 수도 있었는데! 하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감기에 걸리는 등의 잔병치레는 죽어라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안가는 게 습관이 되긴 했죠.

여기까지, 아픈 엄마와 관한 이야기입니다.


타인이 본 나의 가족

추석이라 최근에 부산에 내려갔다 왔는데요, 초딩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오랜만에 밥 한끼 했습니다. 알고보니 그 친구도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구요. 무려 브런치 작가에 글은 100개가 넘었습니다. 2년 전 쓰여진 글 중에는 나에 대한 글도 하나 있더군요. 그런데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거기서 짚어줬습니다. 바로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

우리 집이 특이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엄마가 아픈 것도 있겠지만 평균에서 훨씬 벗어난 집안의 자유로움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제 장래에 관해서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고 나에게 뭔가를 시키는 것이 없었습니다. (집안일은 많이 시켰습니다). 나만의 공략법을 만드는 성향은 엄마가 아파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자식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건 그만큼 책임을 물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니가 알아서 잘 해봐라”는 메시지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네요.

엄마가 아팠던 일들, 일찍 돌아가신 일은 친구가 보기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부모 형제만이 가족은 아니다.

이번 글에선 가족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저를 돌아봤습니다. 글이 글또의 입시 전형으로 쓰인 만큼, 블로그를 이리저리 많이 홍보하는 만큼, 이 글도 보여질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오히려 선입견이나 불편한 마음이 생겨 소통을 더 어렵게 할 수도 있겠죠. 불편한 마음이 끝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나는 까발렸지만 상대는 숨기는, 불균형의 지속.

그러나 결혼할 때 서로의 집안 사정을 공개하는 것처럼 결국엔 알 것들이고 마주칠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부모와 태어남이란 주어지는 것이고 거기에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자칫 결정론처럼 보일 수 있죠. 이런 환경 밑에서는 이런 아이가 자란다. 그런데 가족은 부모 뿐만이 아니라 배우자와 자식도 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내 핏줄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가족이 소통의 중요한 요소라고 했었는데, 거기엔 배우자와 자식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결혼과 자식 농사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설명될지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한 사람의 끝을 보려면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아야 하지만, 이미 자기 대에서 끝을 낼 각오를 지닌 사람들도 많이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아기를 낳고 싶습니다. 어느정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울지 상상하곤 합니다. 일단 돈이라는 종교에 우리 아이가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자랐던 환경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내되, 조금 더 쾌활한 분위기를 내고 싶습니다. 상상은 자유-


더 보기

  • 2020년 여기애도라는 프로젝트에서 진행했던 인터뷰에 참여했어요. 상실을 주제로 인생을 한번 쑥 훑는데, 가족 이야기도 많네요. (링크)
여기애도 아카이빙 (2020)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형제랑 같이 산거야? 계속 쭉 같이 살았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일을 하셨고, 아빠도 계속 직장을 옮겨 다니시느라 큰형, 작은형은 이사를 많이 다녔지. 안락동에서도 살다가 대구도 왔다갔다하고 중간에 아빠가 서울에 가서 엄마가 혼자 부산에 있었던 적도 있고. 그래도 내가 태어난 시점부터는 가족이 떨어져 지내진 않았어. 태어난 건 부산에서 태어났어. 대구에서 한 네 살부터 다섯 살까지 2년 산 것 말고는 계속 부산에 살았지.

집에서 태어났다고 했잖아. 병원 말고 집에서 태어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엄마가 간호사 일을 했었는데, 간호사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그 다음에 교사 일을 했어. 지금은 사라졌는데 전두환 시절에는 있었던 교련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일을 했대. 그 일을 몇 년 하시다가 일을 쉬시던 때에 부산대에서 어떤 강의를 하나 들었대. 철학과 박교수님인가 하는 분이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그 사람 강의를 듣고 엄청 감명을 받은 거야. 그래서 아기를 낳아야겠다, 혹은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나봐. 엄마가 또 소금을 조금 신성시하는 편이었거든. ‘좋은 소금을 써야 몸이 건강해진다.’라던가. 여튼 그런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출산을 하겠다고 해서 집에서 내가 태어났을 때 외숙모가 나를 직접 받아줬다고 하대.

큰 형이 그 모습을 봤었댔나? 응. 징그러웠대. 그리고 1년 뒤에 또 엄마가 애를 가져서 낳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애가 안 나왔어. 그래서 결과적으로 애기는 뱃속에서 죽고 엄마도 굉장히 위독한 상태였는데, 다른 사람 피를 받아서 겨우 살았지. 그 때부터 엄마의 몸이 확 나빠졌어.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엄마가 밖을 거의 못나갔지. 초등학교 때 엄마가 등산을 나가면서 건강을 조금이나마 회복하시긴 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엄마가 건강이 안좋았고 아빠도 일이 있어서 초등학교 입학식도 나 혼자 갔던 기억이 나.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게, 학교에 들어가면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하잖아. 보통 신발장이 교실 옆에 있는데 처음이라 신발장이 어디 있는지 잘모르니까, 벗은 신발을 어디에 둬야하는지 몰라서 흙 묻은 신발을 그냥 가방에 넣었어. 그 상태로 교실에 들어가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식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나봐. 나중에서야 신발장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몰래 꺼내서 신발장 안에 신발을 잘 넣어두고 가방에 안 넣은 척했어.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다면 듣고 싶어. 생애 첫기억은 대구에서 살 때가 첫 번째 기억인데. 한 네다섯 살때 쯤이었어. 그때 아침에 딱 일어났는데 집에 아무도없는 거야. 엄마가 안 보여. 그래서 갑자기 너무 불안해져서 막 집안을 막 돌아다니면서 ‘엄마, 엄마!’하고 계속 불렀어. 근데 엄마가 안보이니까 내가 엄청 크게 울었나봐. 내 기억은 거기까진데, 엄마가 나중에 말하기를, 그때 옆집 아줌마가 내 울음소리에 너무 놀라서 찾아왔대. 와서 나를 막 달래는데 내가 울음을 안 그쳤대. 하필 엄마가 장보러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막 깨어나 가지고. 엄마가 와서 달래도 울음을 안 그쳤다고 하대. 그 정도로 좀 크게 울었던 게 기억이 나.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은, 대구에서 대신동 집으로 이사를 올 때 아빠 차를 타고 왔는데, 대신동의 구덕운동장을 지나는 길에 가로수랑 햇볕이 쫙 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것? 그 때 그 풍경이 강렬하게 남아있지. 그 외엔 기억에 별로 안 남아 있는 것 같아. 아, 어렸을 때, 살짝 특이한건데, 어떤 애착 수건이 있었어. 서양 명화가 들어간 특이한 수건이었는데, 나는 그 수건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졌어. 걔를 배고 자거나 손에 감고 자든지, 얼굴에 곁에 두고 자든지. 어찌됐든 항상 곁에 두고 있었어. 그러다 어느 순간 애착이 서서히 사라진 것 같아. 어떻게버렸는지도 기억이 안나. 어쨌든 어렸을 땐 그런물건에서 굉장히 큰 심리적 안정감을 얻곤 했었는데, 점점 그렇지 않게 것 같아.

밀레의 만종
그 수건에 있던 그림은 밀레의 만종이었던 거 같다

수건에 대한 기억은 몇 살 때까지 기억나? 한 여섯, 일곱 살? 유치원 때까진 가지고 논 것 같아. 뭔가 약간, 향이라고 해야하나? 섬유유연제 같은 인공적인 향이 아니라, 집 냄새나 살내음같은. 그런데에서 안정감을 얻은 것 같아. 또 그 수건엔 명화가 그려져 있었어. 인상파 느낌에 색감도 약간 간단한 느낌의 풍경화가 그려진. 어찌되었든 나중에는 발수건으로 쓰고 사라졌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나온 공간이나 관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에 대해 알려줘. 중학교 1, 2학년 때는 공부를 되게 열심히 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중3 때는 그 전의 노력에 비하면 거의 2분의 1쯤, 했나. 그래서 어쨌든 전체적으로 성적이 좀 떨어지고, 그랬는데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시험을 한 번에 다 풀고 다 찍었다? 그래서 완전히 곤두박질을 쳤는데, 그래서 쌤한테도 불려가고. 그래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래서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지. 자퇴를 생각했지만, 막상 하게되면 힘들 수도 있잖아. 그래서 시험을 다 찍어본 거지. 그게 어떤 기분일지 모르고 어떤 경험일지 모르니까. 지금까지는 규칙에 순응하는 그런 착한 애처럼 보이려고 했었는데, 완전 반대되는 길을 선택해봤을 때 과연 내가어떻게 될까 그런 실험이었을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뭔가 뭐라도 좀 바뀌고 싶었던 걸 수도 있고. 그랬던것 같아. 그런데 해보고 나니까 생각보다 마음이 괜찮은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뭔가 많이 답답했었던 것같아, 그 안에 있는 게, 그 시스템 안에 있는 게. 뭔가불합리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 공부라는 것 자체가 되게 실용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학교에 가는 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어. 처음에 자퇴를 생각한건 뭔가 기분이 너무 꿀꿀하고 답답하고 안 좋은데, 그게 왜인지는 정확히 몰랐어. 학교가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다, 완전 다른 주제인데 ‘자퇴’라는 단어가 나왔어.

학교라는 틀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거네. 어땠어? 처음에는 좀 붕 떠 있었던것 같아. 학교를 가지 않게 된 다음부터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도서관에 갔어. 도서관에서 막 책을 봤어. 그 때도 한참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을 때니까 그런 책도 찾아보고 철학 책도 찾아보려고 하고 다양하게 책을 봤었던 것 같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어? 엄마가 유산하시면서 몸이 계속 안 좋아지셨다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쯤되었을 때는 어느정도 회복을 하셔서 등산도 다니고 할 정도가 되었었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뇌출혈이 와서 다시 몸이 안 좋아지셨어. 그래도 그 때는 거의 회복이 잘 되어서 일상생활이 가능했는데, 일 년 뒤에 한 번이 더 와서 그 때는 데미지가 세서, 오른쪽 반신의 감각이 거의 둔한 상태가 결과적으로 되었고, 그래서 사실 집안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는 정도로 후유증이 남았어. 신경이 이상하니까 땀이 한 쪽으로만 자꾸 난다던가 아프다든가 그런 증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엄마가 아픈 걸 참아내시려고 하는 편이라 내색을 많이 안 하셔서 잘은 모르겠어. 혈관이 두 번째로 터졌을 때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었고 가족이 다 같이 면회를 갔는데, 엄마가 아빠한테 살기 싫다고, 그냥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렸냐, 하신 게 기억에 남아. 그게 마음에 남지. 엄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당시에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엄청 많이 한 것 같아. 삶의 의미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사실 이해가 충분히 되는 말이지, 그게. 그 때 생각을 참 많이 했고, 물론 지금도 생각이 많고. 그런데 뭔가 그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것보다는 뭔가 층위가 겹겹이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 때 당시에는 뭔가 삶이 무의미하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생각위에 다른 생각들이 계속 쌓여서, 이제는 오히려 삶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자 싶은, 하고 싶은 거 좀 더 하고 살아도 되지 않나 싶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생각이 이어지는 것 같고 흐름이 크게 바뀌거나 생각이 크게 전환됐다든가 그런 건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때부터 무의식적일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이 바로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번에 엄마 떠나 보낼 때도 슬프긴 슬펐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해야 되나, 그런 부분도 있었어.

뭐 어쨌든 그 때 그렇게 도서관 오가는 생활을 한 세 달정도 했나, 사람을 너무 안 만나니까 내 스스로가 약간 피폐해지는 기분이 들대. 그래서 처음에 한 게 두 가지가 있었어. 처음에는 성당에 가는 것. 작은 형이 성당 청년회를 하고 있어서 매주 성당에 가는데 거기에 따라간 거지. 두 번째는 봉사활동. 집 주위에 청소년 문화의 집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작은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했어. 보조 사서. 보조 사서는 거의 아무도 없는 한 밤에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는데, 봉사활동으로 했었어. 근데 성당이랑 사서, 둘 다 그렇게까지 재미있지는 않더라고. 그런데 성당에서 부산 노리단을 하고 있었던 구너라는 분이 그 성당을 계속 다니고 있었고, 작은 형이랑도 친했어. 그 사람이 부산에서 하는 꿈다락이라는 걸 알려줘서 내가 그렇게 생활기획공간 통을 가게 된 거지. 왜냐하면 꿈다락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되게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문화적인 프로그램은 통 밖에 없었거든. 나는 시간도 남아돌고, 그냥 한 번 해보자 하는 느낌으로 가본 거니까. 가보니까 되게 별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게 좀 재미있었지. 참가자는 나 포함 한두 명인데 교사만 댓 명 되는 거야.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체험해보는 거였는데 재미있게 한 것 같아. 어쨌든 그래서 그 때는 통에서 자주 놀았고, 뭔가를 많이 했었고, 바싹에서 같이 놀러도 가고, 누나랑 자전거도 같이 타러 다니고, 글도 쓰고, 뮤직쉽도 했고, 이것 저것 많이 했지. 그 때까지도 대신동 집에서 1호선타고 다니고. 그리고 관심 있었던 것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했던 것 같아. 작곡이나 음악에도 관심은 있었지만 그걸 업으로 삼고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안들더라고. 그리고 컴퓨터에도 관심이 있었으니, 프로그래밍을 해보고 싶더라고. 영어랑 코딩을 조금씩 공부했어. 통 바깥에서 하는 코딩 관련 아카데미도 다니고 하면서 조그맣게 어플도 만들어보고. 게임기획도 해보고 했지. 그러다가 알음알음 웹사이트도 만들면서 용돈벌이도 해봤고, 누나랑 수영동 지도도 같이 만들었고. 그러다가 2016년 말에 군대에 들어갔지. 전역하고나서는 군대 가 있을 동안 연락한 아는 누나랑형들이 만든 독립영화배급사인 씨네소파에서 일하게됐어. 주거공동체 빈집인 따또에서 지내기도 하고. 이곳에서 일하면서 여자친구도 만나게 되었고.여자친구는 지금 나한테 무척 소중한 사람이야.

음악은 왜 업으로 삼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어? 음, 일단 당시에 음악 작곡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피아노 얘기부터 먼저 하자면, 내가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몇 년 배웠는데, 그 당시에는 큰 감흥이 없었어. 보통 아이들처럼 그냥 어릴 때 배우고 마는 정도.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때 했던 RPG클래식 게임이 있었는데, 어느 맵에 들어가면 나오는 배경음악이 너무 좋은 거야. 근데 무슨 음악인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으니까, 기억 속 한편에 남겨놓고 있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우연찮게 그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가슴이 벅차오르는거야. 그래서 이 노래를 꼭 피아노로 연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이도가 좀 있는 노래라 연습을 완전 열심히 했지. 그래서 그 곡을 연습하면서부터 피아노 치는게 취미가 됐어. 그때부터 연주하고 싶은 곡이 있으면 악보 뽑아서 치고. 그러다 음악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생긴 거고. 가사가 있는 음악보다 배경음악을 좋아해서 배경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었지. 근데 어느 순간 그 길을 간다고 상상해보니까 너무 힘들 것 같은 거야. 어차피 작곡에 관한 책도 많고 계속 공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건 그냥 취미로 하자고 결심했지.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좋아했고, 작은형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임도 좋아했어. 플래시게임도 좋아해서 직접 만들어 보고싶어서 강좌보고 따라해보기도 하다가 엄마한테 컴퓨터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어. 그래서 컴퓨터 과외를 하게 되었는데,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방과 후 학교처럼 공부하는 게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사무실이 괴정에 있었는데, 그 괴정사무실에 컴퓨터가 여러 대가 있었거든. 그래서 샘이 문자로 ‘보충수업 하러온나’라고 얘기하면 그 샘 수업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와서 같이 PC방 처럼 놀곤했어. 놀이터처럼. 그런 추억도 있었고, 어쨌든 중학교 1학년 때 컴퓨터 활용 자격증 1급을 따놨다. 그러고 사실 더 할게 없어서 그만뒀는데, 어찌됐든 계속 관심이 있었으니까 프로그래밍으로 가보자 결심하고 독학을 시작했지.

스스로의 선택을 돌아보곤 하는 편이야? 아니, 왠만하면 그러지 않는 편이야. 그래서 잘 하고 싶어. 나는 좀 그런 것 같아. 이게 무의식적인 걸 수도 있고 의식적인 걸 수도 있는데, 나는 후회를 잘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잘 잊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지금 생각하면 별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엄마랑 좀 더 같이 못 산 거지. 집에 있으면 엄마가 심부름을 잘 시켰거든. 그게 근데 엄청 힘든 일도 아니고 거절할 만한 건덕지가 없는 일들이었어. 그래도 나는 그런 시킴을 받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집을 나오지 말고 그런 것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제발 좀 시키지 말라고 말을 하거나, 어쨌든 뭔가 갈등을 만드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내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서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더 책임을 지는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집을 나온 건 어떻게 보면 회피를 한 거니까. 그리고 집을 나오고 나서 한두 달 뒤에 엄마 암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게 좀 그랬지…. 나는 보통은 잘 안 부딪히려고 하는 사람이더라고. 그런데, 그래서, 요즘은 잘 부딪히는 방법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그냥 삐지거나 꽁해 있는 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아. 그런 감정이 들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태가 되기도 하거든. 그런데 그건 성숙하지 못한 방향인 것 같아.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좀 더 성숙한 방향으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 관계가 끊어지든 안 끊어지든 후회가 없으려면 책임을 다하거나 노력을 다하거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회피는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거고. 책임을 다 하면 결과가 어떻든 간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자주 헤어지는 상상을 해. 그랬을 때 어떻게 될까 상상을. 엄마, 아빠, 여자친구, 친구들, 모든 사람이랑. 평소에 잘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 이별의 순간이 닥쳐와도 최대한 후회를 안 하려고 해. 슬픈 건 당연한 거고 어쩔 수 없잖아. 슬플때 울면 좀 해소가 되더라고. 그래서 슬플 때는 울어.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인데 옛날에는 우는 걸 안 들키고 싶어 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마음도 많이 덜 해진 것 같아. 나는 최대한 지금의 나 자신에게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만족하는 태도도 어쩌면 습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

엄마랑 아빠는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눈 것 같은데, 나랑 그렇게까지 많이 나눈 편은 아니야. 그래도 엄마랑 등산을 갔던 기억, 짧고 작지만 대화를 나눈 기억 같은 것들은 오래 간직하고 싶어. 나는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거든.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런데 한 편으로는 잊어버리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잃어버리지 않고 싶다는 것도 어쩌면 욕심 아닌가 싶고. 사람도 기억도 언젠가는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고, 언젠가는 올 미래니까. 아직 그 시간이 언제 올 지는 모를 뿐, 예정되어 있는 거니까. 아쉽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어. 여자친구랑 함께 살면서 회피하지 않고 부딪쳐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아.

2012년인가, 자퇴하고 나서부터 힘들거나 마음에 심란한 게 있으면 에버노트에 일기를 썼거든. 하루 있던 일을 쭉 다 쓰는 게 아니라, 주제를 잡아서 에세이 쓰듯 그 때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썼어. 그 당시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게 좋다고 느껴서 지금도 일기를 쓰고 있어. 최근까지는 엄마에 대한 생각을 주로 쓰게 되더라. 요즘은 연애에서 오는 생각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 내가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 때는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의식적으로 기록을 하지도 않을 때니까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것을 중요시했는지를 모르니 조금은 아쉬워. 그래도 그게 막 엄청 그 시절의 나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잃어버릴까 조바심 내지 않으면, 어쩌면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잃어버릴 일이 없지 않을까.